● 생로병사. 태어난 자는 죽는다. 어려서, 혹은 젊어서 죽는 게 아니라면 늙음과 병듦도 피할 수 없다. 불교의 개조 고따마 붓다조차도 늙음, 병듦,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흔히 탐욕과 집착을 경계하는 불교는 질병을 치료하고 육체적 고통을 없애는 일에 무심하리라고 여기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불교는 고통의 치유를 목표로 하는 종교이자 철학이며, 그런 면에서 육체적 질병과 고통 또한 치유의 대상이다. 그러니 불교가 육체적 질병이나 고통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방치할 뿐이라고 여기면 틀린 생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교가 육체적 질병이나 고통의 치유에 집착한다 여겨도 물론 틀린 생각이다. 방치도 집착도 아닌 중도(中道), 이것이 질병과 고통에 대처하는 불교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즉 마음뿐만 아니라 몸의 질병과 고통도 치유하고 달래되, 과욕을 부리지 않아야 한다. 또한 질병이나 고통은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일임을 알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견디면서 치유의 길을 걸어야 한다. 질병은 전쟁터에서 만난 적수라기보다는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드리워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그림자이다. 그림자를 떼어 놓고 걸어갈 수 없듯이 생을 받은 자에게 크고 작은 질병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 본문 19쪽
● 이광수가 만년에 「그의 자서전」(1936)이나 「나」(1947)에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반복해서 소환했던 것은 병든 가족을 바라보던 자신의 시선을 다른 각도에서 투영시킨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질을 앓는 어린 ‘나’를 위해 구렁이 껍질이나 면화 꽃 등의 온갖 약을 해먹이는 아버지는 심지어 외조모의 무꾸리를 속으로는 못마땅해하면서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도 한다. 이 모든 게 병약한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고스란히 이광수 자신이 병든 아내나 자식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옮겨오는 것이었다. 아니, 아픈 가족을 바라보던 이광수의 시선이 오랫동안 기억 속에 접어두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되살려내게끔 만든 셈이다. - 본문 66쪽
● 비리비드 교도소에서 진행된 인체실험은 실험실 내부에서 완결되지 못한 백신 연구를 위한 것이었지만, 하프킨 백신의 효능을 검증하려던 애초의 목적은 달성되지 않았고 오히려 실험의 불확실성만 드러났다. 실험이 진행된 비리비드 교도소는 과학자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정치적 공간이었고, 그로 인해 스트롱의 백신 실험 역시 식민지의 정치적 자장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 자체로 불확실한 백신 실험은 식민지 필리핀에서 또 다른 보호막을 두르고 있던 셈이다. - 본문 99쪽
● 안경 이래 다양한 시력교정기술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의료 현장에서 검사, 진단, 치료하는 데 사용되는 여러 의료기술에 관한 학술적인 연구가 발표되었고, 이들 연구의 시각을 참고하여 시력교정기술의 역사 및 최신 각막굴절교정술의 도입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글은 1950년대 콘택트렌즈부터 ‘드림렌즈’로 불리는 각막굴절교정술이 1990년대 후반에 도입될 때까지 안경 이후 시력을 교정하는 새로운 의료기술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도입되고, 변천해 왔는지를 신문 기사 및 관련 자료를 통해 추적한다. 다만 시력교정기술의 통사(通史)는 아니며,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사용되어 온 안경 이후 이를 대신하거나 이와 경쟁하는 새로운 기술들이 도입, 정착되는 과정을 다룬다. 따라서 ‘안경’이라는 기술 자체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지 않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안경이 발명되어 우리나라에 도입, 사용된 역사가 이 글에서 다루는 시기보다 훨씬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로는 1947년 설립된 대한안과학회가 한국전쟁 이후 재건되어 학술지를 발행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때가 1950년대 후반이었고, 안과전문의들이 조직적으로 자신들의 진료 영역을 구축하던 그즈음에 새로운 시력교정기술인 콘택트렌즈가 국내에 도입되고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 본문 108쪽
● 대화라는 것이 반드시 병을 ‘치료’한다는 차원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도저히 치료의 가망이 보이지 않는 환자에게도 대화와 소통은 일정한 효과를 준다. 반드시 자신의 병이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환자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도와주는 대화는 의료에서 중요한 요소로 간주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가장 구체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짚어냈던 소설이 바로 이광수의 장편 『사랑』이다. 1939년 발표된 이 소설은 이광수 본인의 술회에 따르면 생계 유지를 위해 쓴 작품 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설명되지만, 사실은 이광수가 생각하는 궁극의 의료, 나아가서는 진정한 ‘돌봄’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불교의 자비나 기독교의 박애라는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살펴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 본문 149쪽
● 이주민의 의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계적인 언어 통번역에 머무르지 않고 그들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배려에 기반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한국의 의료 시스템과 문화를 이주민에게 알리고 이해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의료인에게 이주민들의 문화를 알리고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인문학은 이주민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와 한국문화 교육, 의료인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이주민의 문화, 특히 그들에 대한 진료와 치료를 할 때 유의해야 할 사항을 교육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이주민이 의료인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의료인이 이주민에게 권고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묻고 전달하는 소통의 장을 마련하고 소통의 매개자 역할을 할 수 있다. - 본문 1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