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식물은 물론이고 그 전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그 전부의 생명과 생활과 생태의 근거가 되는 지구 자체의 위기까지가 직접적, 현실적, 치명적 위협이 되고 있는 오늘의 생명 위기 시대를, 존재의 근본을 궁극적으로 회의하는 철학자들의 지혜로써 진단하고, 그만큼의 대안을 또한 철학의 빛 속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책이다. 야생동물, 공장식 축산업, 실험동물, 동물권 등으로 생명의 문제를 진단하고, 마음 생태, 자연 생태, 사회 생태의 세 범주로 생태 문제를 분석하며, 탄소중독적 문명의 지표인 TV, 자동차, 아파트, 육식 등으로 생활의 문제를 해부하되, 각각의 문제들을 플라톤에서 홉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마르크스, 니체, 호르크하이머 등을 거쳐 머레이 북친과 들뢰즈.가타리, 피터 싱어 등에 이르는 20명의 철학자들의 철학 속에 재배열함으로써, 세계 철학사를 ‘생태철학사’로 재구조화한 ‘앞으로의 세계 철학사’이기도 하다. 2013년 출간된 『갈라파고스로 간 철학자』의 개정증보판이다.
■ 출판사 서평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류에게 양날의 칼이다. 생태계 파괴의 재앙이 인간을 넘어 생태계 전부와 마침내 전 지구적 범위로 심화되고 있음을 자각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긍정적인 측면이지만, 발등의 불이 된 코로나19 확산 방지와 확진자 치유, 치료제와 백신 개발이라고 하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느라 그보다 더 큰 해일로 다가오는 기후 위기, 생물 대멸종의 지구사적 위기에 근본적으로, 유효하게 대처할 수 있는 골든타임에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인간에게 이중의 자각을 가져다주었다. 하나는 ‘생물인지조차 의심스러운’ 바이러스, 현미경으로도 목격하기 어려운 미물(微物)에게 인류 전체의 안위가 위협받을 만큼 인간 존재의 위대함은 때로 보잘 것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미물에서부터 전 지구적 대재앙이나 기후 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존재와 삶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코로나19가 오기 전에도 이미 익히 이야기되고, 또 익숙해진 ‘사실’이지만, 코로나19로 말미암아 그 진실로 재확인하고, 체험으로써 재삼재사 확신하게 된 점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관통한 2020년이 인류사에서 새로운 변곡점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 변곡점에서 중요한 축은 생명, 생태, 생활의 소중함을 관념이나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운동과 정치(법률이나 제도)로서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 한편으로는, 근대 이래의 성장주의/물질주의/과학주의의 흐름이 여전한 위력과 그들만의 비전을 제시하며 그들의 길을 개척해 가겠지만….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르네상스를 통해 고대(그리스) 철학의 재발견이 이루어졌듯이, 코로나19 ‘이전’ 세계로부터 ‘이후’ 세계로 이행하는 데서도 중요한 것은 철학의 재발견을 이룩하는 일이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 새로운 존재는 단지 의지만이 아니라 사상과 관념과 관습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새로움’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설픈 개혁이나 캠페인 수준의 운동으로서는, 그러한 새로움은 인간의 본능적 욕망에 기반한 거대한 폭식 기계인 근대문명에 금방 잡아먹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수백 년간 몸집을 키워 온 자본주의-물질주의-개인주의 기반 근대 문명의 행보를 보아도 그러하다. 극히 최근에 자유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로 분열되었던 근대문명은 그 분열을 극복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 체제를 전 지구 구석까지 확장하고, 이제 나아가, 우주공간과 가상공간으로까지 영토 확장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인간에게 자가 면역 세포가 있는 것처럼, 인류사의 지혜, 즉 철학적 담론들은 이미 이러한 시대에 대한 충분한 대안들을 내장(內藏)한 채 우리의 탐구와 연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날 인간,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직면한 문제가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 분명한 이상, 그 문제의 해결책은 인간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도 자명할 터. 모름지기, 문제의 해답은 그 문제 속에 있게 마련이다. 이것은 ‘인간이 여전히 문제 해결의 주체’라는 인간중심주의의 연장선상에 놓인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개조(改造)와 개혁(改革), 개신(改新)을 통해서만이 작금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시대에, 인간의 생명(생존)과 생활은 생태의 존속은 지구 전체의 지속성 유지, 즉 지구살림을 통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지구살림, 철학에게 길을 묻다』는 이러한 문제의식과 미래비전 감각으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철학 사상 속에서 지구살림 사상, 그것을 통해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생명, 생활, 생태의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세계철학사를 ‘생태철학사’로 재구성, 재해석, 재조명하는 것이다. 인간 이성의 고유성과 독자성과 절대성을 긍정하고 강화하고 강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온/기술되어 온 세계 철학사를 생태적 관점에서 비판하여 새롭게 조명하고 계승할 것을 재분류한다.
(1) 현실 세계와 격리된 이상적인 세계상으로서의 플라톤의 이데아적 사고는 (그 이후의 서양 철학사에 면면이 그 원질이 계승되어 온 이래) 오늘날 끔찍한 동물학대를 동반하는 ‘동물실험실’의 원천이 된다. (2) 오늘의 문명(물질)세계를 가능케 한 철학적 기반 중의 한 축인 데카르트의 ‘자동기계’ 사상은 예컨대, 근대 초기 반자동식 살인공장으로서의 아우슈비츠나 오늘날의 공장식 축산업을 가능케 한 철학적 기반이다. 그런 점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은, 동물들은 무생물의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세상이 열어젖힌, 다시 말해 지옥문을 여는 것이기도 하다.
(3)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은 또 어떤가. 그것은 ‘개체중심주의’의 원류가 되어, 오늘날 ‘반 생태적, 인간(개인)중심적 세계관과 사회(문명)구조’를 낳는 출발점 중의 하나가 됐다. 인간사회 내부에서뿐이 아니라, 예컨대 동물 개체를 인간 개체와 별개로 상정하고, 그것을 대상화하는 인식이 가능케 된 것이다. 이것은 전체로서의 생태계, 전부의 일부로서의 인간을 해체하고, 기계적으로 재조립하는 삶의 행태를 낳았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우리 인류와 지구 전체를 절멸의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4) <피터 싱어의 공리주의>에 입각하여 “동물 해방이 곧 인간 해방이라는 사상”적 지평을 바라보기, (5) <들뢰즈․가타리의 욕망의 야생성 복원>에서 “인간 내부의 원초적 생명성”을 재활성, 재활용, 재창조하기, (6) <가타리의 에코소피와 근본생태주의>를 관통하며 “생명과 자연과 공명하면서 새롭게 발견․발현․발휘되는 인간의 잠재력”을 인정하기, (7) <머레이 북친의 반자본주의와 사회생태주의>를 통해 “사회변혁운동으로서의 생태주의 사상과 운동의 위상”을 재발견하기, (8) <칸트의 선험적 종합명제와 환경관리주의>에서 “근본생태주의를 보완하며 함께 새 세상을 열어가는 동지적 사상”을 재정의하기, (9) <홉스의 물체론과 아파트 문명>으로부터 “여백과 여지(餘地) 없는 공장식 닭장 같은 아파트 공간으로서의 현대 문명”을 발견하고 그 대안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기, (10) <비릴리오의 전쟁기계와 자동차 문명>에서 “속도 문명과 효율성이 우리 삶과 생명을 좀먹는 방식”을 파헤치고, 느림과 여백의 대안 문명을 다시 주목하기, (11)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와 TV 문명>에서 “인간의식의 동일화라고 하는 반생명적 구조”를 발견하고, 오늘날 유튜브를 비롯한 SNS에서 재현, 확장, 심화되는 구조”를 고발하기, (12) <호르크하이머의 도구적 이성과 육식 문명>에서 끔찍한 “공장식 축산업이나 거대한 환경 파괴에 기반한 육식문명”에 대한 거부로서의 생명의 고유한 본성의 재생을 기획하기, (13) <니체의 초인사상과 핵에너지>에서 “니체의 ‘초인사상’에 기대어 성장해 온 ‘핵에너지 문명’을 탈피하여 생명과 평화의 세상으로 가는 길”을 모색하기, (14) <푸코의 권력의 미시물리학과 화석 에너지>에서 “생명정치의 가동을 통해 화석 에너지 이후의 전환사회를 전망”함으로써 미래 세대에게 새로운 희망을 약속하기, (15) <라이히의 오르곤과 재생 에너지>에서 “오래된 미래로서의 햇빛(재생) 에너지, 생명의 구조와 원리에 순응하는 미래 에너지 체계의 제자리 찾기”를 통해 ‘태양과 바람의 나라’ 꿈꾸기, (16)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기후 위기>에서 “기후 위기가 우리 자신이 낳은 사생아임을 직시하면서 우리 삶과 의식의 심저, 즉 무의식의 세계까지 내려가서 우리의 존재와 삶의 방식”을 재정립하기, (17) <마르크스의 생산력주의와 성장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시 ‘생산력주의’에 기반하고 있음을 재인식할 것과, 발전과 성장의 미래에 대한 신화를 탈피하고” 성장 대신 성숙의 길을 선택하기, (18) <헤겔의 변증법과 생물다양성>에서 “언제나 대립물의 통일을 전제로 하고 또 개별 존재를 지양함으로서 새로운 존재를 지향하는 방식”을 탈피하고, 생명의 실상이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공생의 길로 나아가기, (19)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생태계 보존>에서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생태계의 가치, 스스로를 주장하지 않지만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만물의 존재 의의를 재발견”함으로써 생태계의 보이지 않은 연결망에 재접속하고, “순환과 재생의 사회”를 향유하기 등을 철학한다.
새로운 철학으로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철학의 새로운 발견, 철학의 새로운 조명은 이미 도래하고 있는, 우리의 생존의 생활의 생명의 기회로서의 새로운 세상을 우리가 발견하고, 또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그물을 짜는 일이다. 단지 철학을 음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철학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 스스로가 기꺼이 그 그물의 소재가 되고 일부가 되는 일이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를 약속하는 새로운 철학사가 탄생한다!
■ 책 속으로
● 사람들은 이미 공장식 축사가 어떤 곳인지를 이미 대개는 알고 있다. 그러나 너무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거니와 생명의 본성과 멀어져 있는 소비문화에 젖어서 그것을 망각해 버리기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그러한 소비를 위해 직장에서 자동기계처럼 일하는 자신의 상황이 비참하다고 말한다. 정말 생명이 숨 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생명을 대하는 태도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삶도 바뀔 것이다. 그렇게 자동기계처럼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신체의 영역을 자동기계로 보았던 데카르트의 사상이 동물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그 결과가 공장식 축산업으로 나타났다는 짧은 철학적 스케치를 하는 동안, 이 구도의 외부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옆에서 잠자고 있는 작은 고양이의 숨결이 만들어내는 들숨날숨처럼, 여리고 아름다운 생명의 숨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명을 아름답게 보는 것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것도 가능하다는 희망과 낙관을 가지며. - 본문 52-53쪽
● 주말이면 동물원을 방문해 여가를 즐기고 자녀들에게 체험을 시켜주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동물원은 학습의 공간이 아니라 학대의 공간이다. 아이들은 대부분의 동물들이 우리 안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 동물들이 자율적인 행동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기력하고 축 처진 존재라고 잘못 알게 된다. 그리고 동물원은 관객을 더 많이 불러들이기 위해 마치 TV나 영화에 나올 법한 동물 쇼를 보여준다. (중략) 동물원은 야생동물에 대한 인류 문명의 태도를 의미하며, 동시에 어른 사회가 아이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어떤 극단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를 기괴하게 보여주는 체험 장이기도 하다. 동물처럼 아이들도 야성적으로 무리 짓기를 할 수 있는 자율과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 본문 100쪽
● 프랑스 철학자 가타리는 『세 가지 생태학』이라는 책에서 마음생태, 자연 생태와 더불어 사회생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회적 관계와 배치의 변화 없이 생태 위기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타리는 북친의 사회생태주의를 ‘세 가지 생태학’의 일부로 끌어들이면서 전략적 동맹자로 함께 행동할 것을 주문한다. 프랑스 녹색당과 녹색정치의 전략 지도와 같은 『세 가지 생태학』을 굳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북친의 사회생태주의가 현대의 생태주의 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하다.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는 코뮌주의 운동이 생태 위기를 극복할 것이라는 북친의 생각은 인간 사회의 잠재력을 포기하지 말자는 호소와도 같은 것이다. 북친의 사회생태주의는 코뮌과 같은 사회적 관계망이 갖고 있는 사회 변혁의 잠재력에 호소하여 생태 위기의 주범인 자본주의를 극복해 보자는 주장이다. - 본문 151-152쪽
● 오늘날, 속도를 내며 질주하는 자동차에 몸을 싣는 것은 마치 암울한 미래로 가는 탄도미사일에 몸을 싣는 것과 같다. 비릴리오는 속도가 어떻게 노동자 운동을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전략을 붕괴시켰는지를 담담히 이야기하는데, 속도를 일으키는 운송수단과 통신수단은 전쟁 무기 수준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비릴리오의 진단이다. 현대의 전쟁에서 정지는 곧 죽음을 의미하며, 빛의 속도로 기존 관계망을 파괴해 내부의 적을 감지하는 것이 새로운 전쟁의 모습이 되었다. 냉전 시기 이후의 정보통신혁명의 눈부신 발전도 외부의 적에서 내부의 적으로 겨냥하는 것이 달라졌을 뿐, 끊임없이 속도를 가속화하여 내부의 적과 대결하려는 전쟁 무기와 같은 위상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자동차가 질주하면서 파괴하는 것은 환경이나 생명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삶이 지닌 장소적이고 영토적인 의미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자동차로 인해 자신의 장소와 영토가 얼마나 풍부하며 다양할 수 있는지를 완전히 망각하도록 삶의 관계망이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동차는 우리의 편리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을 겨냥한 무기일 수 있다. - 본문 210쪽
● 나치의 핵개발 시도는 독일 우정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초기에는 엄청난 물량과 인력이 투자되었지만 나중에는 나치가 핵 개발이 될 때까지 전쟁을 끌면 불리하다는 판단에서 재정 후원이 약화되었다. 당시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아 유명해졌던 하이젠베르크는 베를린물리연구소 소장으로 나치의 핵무기 개발에 관여하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중수(重水)를 실은 배가 연합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거나, 나치의 핵무기 기술이 미국의 핵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 등을 연구조사를 통해 밝히고 있다. 역사적인 실증조사가 어떻게 이루어졌건 간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독일 점령은 나치의 핵무기 개발을 중지시키고, 그 기술력을 미국 등 연합국에 이전시킨 것 같다. 나치의 핵개발 시도는 니체의 초인 사상이 사실상 핵을 통해 완결될 수 있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응시한 결과로 나타났다. 아주 국지적이고 부분적인 영역에서의 원자들의 충돌이 연쇄반응으로 전체 사회를 파괴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원자폭탄의 원리는, 사실은 가치 창조자이자 가치 파괴자인 초인의 사상의 궤적을 따른다. 핵 에너지는 생명과 생태계의 원리와 무관하게 색다른 움직임이 창조될 수 있다는 양자 수준의 가치 창조자인 초인의 다른 모습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핵 에너지는 파시즘의 숨결을 갖고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 본문 273-274쪽
● 기후 위기의 문제는 문명이 잘 돌아가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정상영업 상태로 너무도 잘 굴러가고 있기 때문에 야기되는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녹색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근본적인 변화는 생각하기 어렵다. 녹색 전환은 사실상 우리가 더 불편해지고 문명이 제대로 굴러갔을 때 향유했던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에너지 집약적인 삶 대신 재생 에너지 등을 기반으로 덜 쓰고 아끼며, 줄이고 제한하는 삶의 방식으로 바뀌어야 기후 위기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모두가 부자가 되기 위해 달려갔던 시대를 넘어서 모두가 가난해지려는 방향으로 향할 때 기후 위기에 대한 해법은 생각보다 쉽게 찾아올 수 있다. - 본문 340쪽
● 생물다양성의 논의는 ‘개체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라는 두 가지 시선 간의 논쟁을 종식시키는 측면이 있다. 개체중심주의가 지나치게 생명 하나하나의 권리나 복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비판하는 입장이나, 생태중심주의가 지나치게 개체의 자율성을 도외시한다고 비판하는 입장 둘 다가 극복되는 측면이 있다. 생물다양성은 개체적이면서도 생태적인 측면 모두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생물다양성은 동식물 개체 각각의 보존에 관심을 갖게 하는 개념이면서, 생물다양성이 조성하는 생태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하는 개념이다. 헤겔의 인정투쟁의 입장은 ‘인간중심주의’에 입각한 개체중심주의적 편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신성가족의 반경 내에 꽃과 나비와 강아지와 나무와 같은 생물들이 있다는 점을 응시하고, 이들이 인간 개체 입장에서 정립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공생하는 다수의 개체들이면서 동시에 생태계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 본문 3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