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북도에 동학이 유입된 것은 창도주(수운 최제우) 재세 시기(1864년 이전)부터라는 일부의 주장도 있으나 대략 최시형의 포덕을 기점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앞의 주장은 1860년대 창도주 최제우의 남원 지역 행적 때문인데, 그가 남원 교룡산성 은적암에 도피하여 경전을 집필할 당시 금산 남원지역에 동학이 포교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입도했던 도인의 행적은 수운 순도 이후 멸절되다시피 했고, 본격적인 동학 포교는 1880년대 말 동학 2세 교주 최시형의 전라도 잠행 포덕으로 동학이 널리 퍼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892년 공주·삼례 취회, 1893년 광화문 상소, 보은 취회 등 교조신원운동을 거치면서 동학교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 본문 18쪽(전라북도 총론 편)
● 황토재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감영군을 대상으로 전투를 벌여서 거둔 최초의 값진 승리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 등 전라도 지역을 차례로 점령하여 군세 확장에 나섰다. 황토재 전투 승리로 동학농민군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전라도 지역 세력 규합에 성공한 동학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 황룡 전투에서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고 여세를 몰아 파죽지세로 전주성을 함락하게 된다. - 본문 89쪽(정읍편)
● 고창 재봉기란 1898년과 1899년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된 농민봉기를 뜻한다. 1898년 흥덕 농민봉기는 흥덕 군수의 탐학에 저항한 사건이며, 1899년 봉기는 1898년 때 주동 인물인 이화삼을 구출할 목적으로 일어났다. 농민 봉기 수습 과정에서 당사자인 흥덕 군수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이화삼은 고창옥에 갇혔다가 광주옥으로 이감된다는 소문을 접하고 영학당을 주축으로 봉기했다. 동학농민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고부 말목 장터에서 기포하여 고창 관아를 습격했다. 그러나 고창 관아는 방비를 한데다 때마침 몰아친 폭우로 패퇴하고 말았다. 이들 중에 김장일(金長一), 양선태(梁先太), 오재봉(吳在奉)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1899년 재봉기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그해 9월 광주옥에 수감됐다. - 본문 118쪽(고창편)
● 일본군의 참전으로 패배를 거듭한 동학농민군은 살아남기 위해 무리를 해산시키고 피신해야 했다. 지역 유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보군 토벌대가 마을 마을을 지키고 있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동학농민군은 관-일본-민보군에 붙잡혀 희생되거나 인근의 산속으로, 혹은 강진의 대구 칠량을 거쳐 해남으로, 보성 회령으로, 또는 회진 등 남쪽 바닷가로 숨어들었다가 배를 타고 섬으로 숨어들어 생명을 보존해야 했다. 당시 일본군이 전라도 각 군현의 수령들로부터 동학농민군 처단 결과를 보고받았는데, “해남 250명, 강진 320명, 장흥 320명, 나주 230명, 그리고 함평, 무안, 영암, 광주, 능주, 담양, 장성, 영광, 순창, 운봉, 무장 등에서는 30~50명씩을 처단했다”고 했으니 당시 희생자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 본문 163쪽(전라남도 총론 편)
● 일본군 진압부대인 후비보병 19대대 800여 명이 서울에서 세 갈래로 남하했다가 이곳 나주에서 다시 합쳐져 나주 객사 금성관에 숙영했다. 당시 후비보병 19대대는 잔인하기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는데, 이들은 ‘3광(光) 작전’이라고 해서 보이는 사람은 모두 죽이고, 보이는 것은 모두 태우고, 뺏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빼앗았다. 일본군은 영암, 강진, 장흥, 해남, 진도 쪽으로 포위망을 좁혀오면서 동학농민군을 붙잡는 대로 살육을 자행했다. 이 시기에 나주성 남문 밖이 동학농민군의 처형장이었다. 12월 말부터 1월 초까지, 거의 날마다 처형이 자행되어 “동학농민군 시신 600여 구가 산처럼 쌓였다”고 했다. - 본문 244쪽(나주편)
● 장흥 지역 참여자는 전국 참여자 3,644명(명예회복을 위한 참여자 명부 기준) 중 386여 명에 이른다. 대개 1890년대에 동학에 입교한 교도와 접주급 동학 지도자들이며, 교조신원운동 시기에 금구취회, 보은 취회 참여로부터 백산 기포, 황토재 전투, 황룡 전투, 전주성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 2차 기포 이후에는 공주 우금티 전투, 남원성 전투, 강진성 전투, 병영성 전투, 회령진 전투, 벽사역 전투, 석대들 전투, 대내장 전투, 옥산 전투, 자울재 전투, 월출산 불티재 전투 등에 참여했다. 이들은 장흥 지역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아 처형되기도 했지만, 강진, 해남, 보성, 영암, 진도, 나주 지역으로 도피 중에 붙잡혀 희생된 이들이 많다. 사망자로는 전사 18명, 총살 116명, 처형 77명, 분살 1명, 자결 1명, 옥사 2명, 압송 5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희생됐다. 특히 벽사역 희생자는 102명에 이른다. - 본문 301쪽(장흥편)
● 당시 고흥 동학농민군의 무기 수준은 수성군의 보고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곧, “포군 정재홍이 유복만을 붙잡을 때 회룡총(回龍銃) 1정을 소지하고 있어서 노획했고, 포군 김연삼이 거괴 함양진을 체포할 때는 모젤총 1정을 빼앗았다.”고 했다. 고흥 동학농민군의 무기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즉, “흥양성 전투 뒤에 포군총장 김정태로 하여금 포군을 거느리고 그 인근 지역을 살피도록 했는데, 당시 노획하거나 찾아낸 군기가 조총 13자루, 화약 8근, 연환 300개, 화살 300여 개”라고 하여 고흥 동학농민군이 어느 정도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본문 356쪽(고흥편)
● 동학농민군의 연명책으로 제주도 피신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학당 정토대(征討隊)” 대장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독립후비보병 제19대대 대장 미나미 코시로(南小四郎)의 1894년 12월 24일 자 보고에 “동학농민군 2~3천 명이 해남으로부터 진도와 제주에 와 있다.”고 보고했고, 본부에서는 이에 대한 토벌령이 내려졌다. 다만 토벌 상황이 없다. 진도군 의신면 만길과 원두는 나주 나씨와 제주 양씨들의 집성촌이자 진도에서 알려진 부자마을이었다. 여기에 최초로 입도한 나봉익(羅奉益)과 양순달(梁順達)이 살았으며, 마을 사람들 모두 동학을 신봉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교도는 급속히 늘어나 진도군 의신면, 고군내면, 조도면, 진도면에 동학교도가 특히 많았다. - 본문 373쪽(제주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