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 서평
1. 스승이 그리운 시대
동학혁명(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가장 보편적으로 자리매김된 역사 서술은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1차 기포에서 전승하였으나, 2차 기포에서 관군-일본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막혀 실패한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동학란’이나 ‘동학운동’ 또는 ‘갑오농민전쟁’이라는 갖가지 왜곡되고 편향된 역사 인식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재조명되고, 특히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자치정부’라고 할 수 있는 ‘집강소 통치’를 전라도 일대에서 시행한 혁명이라는 긍정적인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여전히 동학(농민)혁명은 청일전쟁을 야기하고, 결국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부정적인 인식 또한 깊숙이 뿌리 박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동학혁명에 대한 인식의 지평은 촛불혁명 이후 새로운 차원을 맞이한다. 우선 동학혁명은 1894년에서 1895년에 걸쳐 벌어지고 패배로 종결된 혁명이 아니라는 인식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동학혁명의 시간적 확장과 공간적 확장으로부터 가능해졌고, 또 그러한 인식의 확장을 심화시켰다. 첫째, 동학혁명은 1860년의 동학 창도라는 사건을 핵심 출발점으로 해야만 그 혁명성(개벽적 성격)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점에 대한 인식이 뚜렷해졌다. 둘째, 1890년대 들어 매년 그 규모와 성격이 확장 심화하면서 전개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冤運動=斥倭洋倡義運動)’을 구체적인 계기로 한다는 인식이 뚜렷해졌다.
이로써 동학혁명의 이해에 ‘비폭력’의 정신과 ‘생명평화’ 정신, 그리고 ‘민회(民會)’로 대표되는 민(民)의 각성과 자치(自治)의 정신이 새롭게 더해졌다. 셋째, 갑오년 이후 동학혁명이 의병전쟁 → 독립군 투쟁 → 3·1혁명 → 임시정부 → 의열단 → 광복군 → 4·19혁명 → 광주민주화운동 → 6월 항쟁 →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족사 저변에 도도히 흐르는 ‘저항의 마그마’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즉 이러한 인식은 “개화 실패 → 식민지화 → 자주적 광복의 실패 → 분단 → 독재체제”를 상수(常數)로 하고 이에 대한 도전을 변수(變數)로 인식하던 그동안의 역사인식과는 정반대의 위상을 나타낸다.
『개남, 새 세상을 열다 - 동학혁명과 김개남』은 이러한 역사 인식을 기반으로, 그동안 ‘사료부족(史料不足)’을 이유로, 그리고 ‘과격파(過激派)’라고 하는 지배층의 인식을 기반으로 편향되게 인식해 온 김개남에 대한 본격적인 조명과 새로운 접근의 가능성을 모색해 본다. 특히 그동안의 동학혁명 이해에서 김개남과 전봉준은 ‘노선 차이’로 인한 갈등을 드러냈고, 그것이 혁명이 실패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고까지 그려져 왔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갈등과 패배’ 지향의 동학혁명 이해를 거부하고,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첫째, 김개남과 전봉준은 전주성 입성까지는 함께 움직이지만 그 이후 행동반경을 달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김개남 - 전봉준뿐만이 아니라 손화중이나 김덕명을 위시하여 각 지역별로 근거지를 가지고 활동하던 대접주들이 모두 자립적, 자주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두 사람 사이의 갈등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전봉준을 선봉장으로 손화중을 후군장으로 하는 가운데 김개남은 중군장으로서, 전주성 - 삼례 - 공주 경로를 거쳐 한양으로 진출하는 전봉준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주성 - 삼례 - 청주의 경로를 거쳐 한양으로 진출하려 함으로써 관군-일본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려 한 점을 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가설은 단지 가설이 아니라 전봉준(장성-피로리)과 김개남(태인-종송리)이 혁명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관군에게 체포될 당시 불과 몇 리 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이들이 공주 - 삼례(합류) - 전주까지 함께 이동하였다가 각자 휘하의 동학농민군을 흩어 버리고 비밀리에 다시 만나서 재기포(再起包)를 도모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즉 이 시기까지도 전봉준과 김개남은 가장 긴밀한 혁명지도부의 심장이었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둘째, 전봉준과 김개남의 노선의 차이에서 전봉준은 근왕주의(勤王主義)적 관점에서 기존의 지배계층(양반 관료배)들과의 대립을 최소화하여 ‘척왜양’에 한층 더 무게중심을 둔 개혁을 목표로 움직였다면, 김개남은 기존 지배계층과에 대한 비타협적 노선을 견지하면서, 조선왕조를 전면적으로 전복하는 혁명을 목표로 움직였다는 논리에 대해서이다. 이것은 김개남이 본래 ‘김기선’이던 이름을 “남쪽에서부터 새로운 왕조를 연다”는 뜻에서 ‘개남(開南)’으로 바꾸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서 뒷받침된다. 그러나 이번 저술을 통해서 개남(開南)은 새 왕조의 의미보다는 ‘새 세상(=南朝鮮)’의 의미로서 혁명보다는 ‘개벽(開闢)’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음을 조심스레 제기하였다.
셋째, 동학혁명의 핵심 키워드를 재정의하였다. 즉 개벽이야말로 동학(東學)의 본령에 해당하는 세계관이며 민중들에게 제시한 미래 비전이라는 점, 김개남은 전봉준보다 훨씬 더 동학교단의 핵심(해월 최시형, 북접법헌)에 밀착하였으며, 실질적인 세력이 크고 광범위했던 대접주라는 점 등을 돌이켜볼 때 개남의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동학혁명의 성격과 지향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전봉준이 ‘입헌군주제’를 정점으로 하는 정치혁명을 도모하였다면, 김개남은 신분제 타파와 새로운 사회질서의 구축을 기본 출발점으로 하는 ‘새 세상[南朝鮮]’을 지향한 개벽운동가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책에서는 이에 대해 더 깊고 폭넓은 논의를 지속하기보다는 그 가능성과 필요성을 제기하며 후속 논의를 기다리는 선에서 마무리하였다.
김개남은 동학의 개벽 사상을 체화하여, 새 세상을 열고자 한 개벽적 혁명가였다. 그가 보인 ‘과격성’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돌아갈 수 없다는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작업이었으며, ‘개벽적 혁명’을 반드시 성공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들이었다. 김개남이 청주성 전투에서 ‘어이없이 패배’를 당하고, 패전을 거듭하며 후퇴하여 결국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관군에게 붙잡히는 과정은 어쩌면 허망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김개남을 통해서 보는 동학혁명의 역사’는 1894년에 종결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21세기 한반도 한복판에 여전히 살아 있는 역사로,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개남(開南)이라는 그의 이름이 암시하듯, 동학(東學)과 동학혁명이 ‘열린 결말’로서, 우리 민족, 나아가 우리 역사에 언제나 새로운 비전과 영감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분단의 극복과 생명(생태) 위기의 극복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동학의 생명평화주의와 동학혁명의 혁명-개벽주의는 다시금 ‘오래된 미래’로서의 지혜를 우리에게 심어주고 있다. 그 중심에 김개남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김개남 장군은 동학혁명은 물론 동학의 무극대도에 ‘무궁’히 다가갈 수 있게 하는 열린 역사이며, ‘개남’이라는 이름은 그래서 그의 운명이 된다. ‘남(南)’은 그저 ‘남쪽’이 아니다. 남쪽에서 시작되는 봄과 같이, 새롭게 열리는 세상, 동학 식으로 말하자면 후천개벽의 새 세상이며, 그 세상을 향해 열린(開) 문이 김개남 바로 그 자신의 실존이며, 우리에게 향하는 그의 유훈이다. 그 새 세상(南)을 향해 열린(開) 문, 개남(開南)은 그러므로, 늘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다. 새 세상을 향한 우리의 꿈은 언제까지나 계속되기 때문이다.” (본문중 에서)
■ 책 속으로
● 좌절된 혁명가 치고 억울하고 분통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지만, 동학혁명 시기의 김개남(金開南, 箕範, 본명 永疇, 1853~1894) 장군과 같은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동학혁명은 전봉준·김개남·손화중의 3대 지도자에 의해 전개되었다. (중략) 그러나 전봉준을 그러한 위상으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그의 동지들 특히 김개남, 손화중의 동지적 결속이 필수적인 요소이다. 무엇보다 김개남과 손화중은 동학 조직 내에서 전봉준보다 상위의, 더 광역을 포괄하는 지도자(대접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조직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추대함으로써, 혁명 역량의 구축과 동학 조직 동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27~28쪽
● 동학은 최제우가 순도(殉道, 1864, 대구)하면서 해월 최시형에게 도통(道統)이 이어졌다. 해월은 강원도에 은거하며 동학의 세력을 키웠고, 충청도를 거쳐 1880년대는 호남 지역에까지 동학 세력을 넓혔다. 호남 지역의 교세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도근(道根)이 얕은 도인들을 지도하기 위해 1891년 호남지방을 순회하였다. 이때 해월은 김개남의 집에 며칠 머물렀다. 김개남이 한 해 전(1890, 또는 1885년 전후, 해월이 최초로 호남을 순회할 당시)에 동학에 입도하여 인근에 포덕을 널리 한 대접주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또한 당시 김개남이 살던 윗지금실의 집은 여러 사람이 머물러도 좋을 만큼 큰 집이었다. - 49~50쪽
● 보은취회(집회)에는 김개남도 태인 지역을 중심으로 한 관내의 동학도인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특히 보은집회를 앞두고 김개남은 김기범(金箕範)이라는 이름으로 태인포대접주(泰仁包大接主)로 임명되었다. 그동안 동학의 접(接)과 포(包)는 접주나 대접주의 이름을 따서 ‘손병희포’ ‘김개남포’ 등으로 불렸던 것을 이때 비로소 각 포에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주요한 포를 보면 태인포 김개남(김기범) 외에 (중략) 이로써 김개남은 동학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즉 그동안 해월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던 데서,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교단 조직의 공적인 체제 속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 98~99쪽
● 이(=관군과의 휴전 및 전주화약)에 대해 개남장(開南丈), 김개남의 입장은 완강했다; “탐관오리는 왕도(王道)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무분별한 인재 등용에서부터 발생한 것이오. 임금이 부실하면 나라에 액운이 오고 도처에 민란도 거듭 발생하는 것이며, 군왕(君王)이 현명한 성상(聖上)이 되는 것은 임금에게 달린 것이지 하늘에 있는 것은 아닌 것이오. 또 미운 자에게도 유공(有功)하면 필상(必賞)하고 착한 자라도 유죄를 하였을 때 필벌(必罰)하였다면 탐관오리는 있을 수없는 것이오.” (중략, 김개남은) 이번 기회에 부패 무능한 왕조를 뒤엎고 그 힘으로 외적을 격퇴하자는 주장이었다. 또한 사발통문의 4개 항의 결의 중 “전주영(全州營)을 함락하고 경사(京師)로 직행(直行)할 사(事)”라는 항목에서 보이듯 서울(한양)로 북진하여 중앙의 탐관오리들을 척살하고 국정의 기틀을 쇄신하는 것이 일관된 목표였다. - 210쪽
● 동학의 후천개벽은 왕조 교체나 천지의 새로워짐만이 아니라, ‘다시개벽’으로서 낡은 것이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인간의 하루하루의 삶과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토로 만드는 일과 같은 노동과 토지의 개벽, 그리고 교육을 통한 한 가문의 개벽, 풍습의 개량과 같은 인문의 개벽, 계절의 변화와 같은 한 해의 개벽, 성인(聖人)의 탄생을 불러오는 천 년의 개벽, 그리고 무극대도의 출현과 같은 오만년의 개벽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포함하는 전면적이고 일관되는 것이다. 김개남은 이러한 개벽의 일환으로 혁명을 준비하였다. 우선 독자적인 역량을 비축하여 재봉기를 시도하면서 전봉준·손화중 등 동지들의 협력을 이끌어낸다는 구상이었다. 이를 위하여 남원을 근거로 무기와 군량을 회복하고 병사들을 모아 훈련시켰다. - 234쪽
● 김개남의 독자적 노선이 전봉준과의 심화된 대립적 관계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좀 더 구체적인 점검을 필요로 한다. 근래 들어 이러한 평가를 새로운 차원에서 조명해 보아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즉 “전봉준과 김개남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동지적 관계가 훨씬 더 깊었던 데다 제1차 기포 때부터 남원대회 때까지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했던 점, 2차 기포 때 역시 연락은 오갔다는 점, 또한 김개남이 다른 진격로로 북상함으로써 농민군 세력을 결집시키지는 못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관군과 일본군 병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노릴 수 있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특히 공주와 청주에서 각각 패전하여 패퇴를 거듭하던 중 “전봉준이 김개남과 만나 재기를 도모하려고 피노리(避老里)로 숨어들었다가 체포됐다는 점도 이들의 관계가 대립과 갈등 관계로만 규정되는 것에 많은 (異論의-필자주) 여지를 제기하는 근거”라는 것이다. - 280쪽
● 그는 한 마리 텃새였다. 조선의 텃새였다. 하늘로 들어가는 길을 몰랐을 리 없고, 하늘로 들어가는 문을 모르지 않았을 그는, 마땅히 이 땅의 텃새들인 농민과 천민들과 함께 살고 죽고자 했던 한 마리 텃새였다. 비참한 죽음이었지만, 그의 삶과 투쟁과 죽임은 이 땅에서 수탈당하고 탄압 받고 소외된 민초들의 아픈 역사를 대변하고, 이후 의병→독립군→3·1혁명→임시정부→의열단→광복군→4·19혁명→광주민주화운동→6월항쟁→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족사 저변에 도도히 흐르는 ‘저항의 마그마’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근현대 민족운동사의 뿌리, 그 원맥(原脈)은 동학혁명에서 기원한다. 광제창생·보국안민·반봉건·척왜척양의 동학(과 농민혁명)에서 근원한다. 그 중심에 김개남 장군이 있었고, 시대정신에 충실한 첨병이었던 그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리고 목이 잘렸지만, 늦게나마 눈 밝은 사람들이 있어서, 앞에서 인용한 대로 연구가 진행되고 새로운 평가가 따른다. - 342쪽
■ 저자
김삼웅 _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지금의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회 위원, 3·1운동·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사업회 위원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 등 이 분야의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주요 저서로 『한국필화사』, 『백범 김구 평전』, 『을사늑약 1905 그 끝나지 않은 백년』,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안중근 평전』, 『이회영 평전』, 『노무현 평전』, 『김대중 평전』,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 『민주주의자 김근태 평전』, 『안두희, 그 죄를 어찌할까』, 『10대와 통하는 독립운동가 이야기』, 『몽양 여운형 평전』, 『우사 김규식 평전』, 『위당 정인보 평전』, 『김영삼 평전』, 『보재 이상설 평전』, 『의암 손병희 평전』, 『조소앙 평전』, 『백암 박은식 평전』, 『나는 박열이다』, 『박정희 평전』, 『신영복 평전』, 『현민 유진오 평전』, 『송건호 평전』, 『외솔 최현배 평전』, 『매천 황현 평전』, 『3·1혁명과 임시정부』, 『장일순 평전』, 『의열단, 항일의 불꽃』, 『수운 최제우 평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