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 서평 역사에 패배란 없다, 다시 시작, 다시 개벽이다!
1부(1, 2권)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는 주로 수운을 이야기한다.
그간의 동학-
수운을 다룬 소설에서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허구적 인물이나 에피소드가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그 서술이 역사 기록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표영삼의 "
표영삼의 동학이야기"(
모시는사람들)
이상으로 동학 창도기를 소설화한 작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표영삼은 끊임없이 객관적 동학역사 서술에 매진하였지만,
그것을 '
스토리텔링'
으로 풀어나가는 데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다고 본다.)
김동련의 <
소설 동학>
이 성취한 부분은 바로 동학 창도기의 수운의 고뇌,
그리고 그가 깨달은,
혹은 창도한 동학의 철학적,
사상적,
종교적(
영성적)
깊이에 도달하였거나,
도달하는 경로를 열어 보여 주었다는 데 있다.
김동련은 수십 개의 징검돌처럼 놓인 수운의 역사(
팩트)
사이를 동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삽화(
揷話)
들로 가득 흐르고 흐르고 흐르게 하여 동학 창도기의 깊고 풍부한 개벽의 강물을 펼쳐 보인다.
예컨대 수운 청년기의 장궁행상(
藏弓行商)
은 수운이 무과 시험에 응시하여 실기나 대책(
對策)
모두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두지만,
탐관오리의 농간으로 등제에 실패하고 마는 장면을 드라마틱하고 서사시적으로 그려낸다.
이 장면은 마치 KBS
대하 사극 내지 블록버스터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또,
수운이 '
행상(
行商)'
으로서 '
성공적인 길을 걸어가는 모습'
도 역사적 상상력의 범위를 이탈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흥미진진하게 그려 보인다.
이는 <
장길산>
이나 <
임꺽정>
의 한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수운이 한울님과 문답을 나누는 체험을 하고,
신유년(1861)
에 포덕을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용담으로 밀려들어왔을 때의 온갖 행태들이 짧지만 강렬한 에피소드들로 모두 소화되고 있다.
이 장면 하나하나는 동학의 역사 기록(
관변기록)
의 내용들을 관의 관점이 아니라,
민중 자신의 관점 혹은 수운-
동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으로 그려 보인다.
2부(3, 4권) "세계라는 것은 무엇인가"는 수운 최제우가 대구장대에서 좌도난정률의 죄목으로 참형당한 이후부터 이필제의 영해교조신원운동을 거쳐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이른바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는 1893
년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는 동학의 역사에서도 파란만장하였으나,
조선사회 전체가 거대한 세계사에 편입되면서 끊임없이 망국으로의 길을 걸어가던 시기이다.
그 속에서 동학 민중은 민중대로,
그리고 임금과 신하들은 또 그들대로 모색과 협잡,
궁리와 좌절을 거듭해 간다.
동학 창도기에는 수운 자신이든 그 주변에 몰려들었던 '
동학 민중'
들이든 누구나 개벽 세상에 대한 희망,
사람이 한울되는 세상에 대한 전망을 안고 달려갔다면,
이 시기에는 좌절과 고난 속에서 희망을 씨 뿌리고 그것을 맨손,
맨몸으로 일궈 나가며,
희망의 이유를 조직하는 해월과 그 주변 동학 민중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작가는 이들 장면들을 일일이 설명하기보다는 해월을 둘러싼 인물들과 끊임없이 동학을 침탈하는 조정 주변 인물들의 치열한 자기 존재 증명의 노력들을 대립해서 보여주는 것을 그려나간다.
단순한 선악 대결이나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과 같은 어설픈 역사 그리기는 없다.
오직 소설적 언어로서 30
년의 역사를 끈질기게 묘파해 나간다.
이러한 소설적(
동학적)
전개 방식은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이라고 할 문장에 실려서 전달됨으로써 더욱 강력한 빛을 발한다.
즉 간결하고 청신하고,
품격이 넘치면서도 강건한 문체는 독자들을 시종일관 동학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그 호흡을 함께하게 한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당대의 문집,
또는 상소문 등을 그대로 인용한 것 같은 수많은 문장들은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며 발화함으로써 관계 맺고 그리하여 사회와 역사를 이루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당대 인물들을 생생하게 살려내고,
독자들을 그 속으로 끌어들인다.
3부(5, 6권)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는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
세계사적 지평'
에서의 조선 사회와,
그 사이를 헤쳐 나가는 동학의 모습을 주로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을 통해 그려나간다.
이 속에서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같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역사 인물만이 아니라,
동학을 적대시하며 대립하거나,
동학 속으로 침투하거나 간에 다양한 인물군상들을 다양한 어조로 조명해 나간다.
그간의 동학 소설들이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서 동학의 정당성을 과장하고 지배세력과 외세의 부당함을 강조하는 데 치우쳐서,
무선무악한 역사의 잣대(
균형)
를 상실하였다면,
이 소설은 끝내 그 관조와 냉철을 빼앗기지 않는 강인함을 유지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환상적인 대목 중의 하나는 '
여동학'
장흥 '
이소사'
에 관한 부분이다.
이소사는 관변기록에도 등장하는 동학농민혁명의 '
여성 지도자'
이면서 신이한 행적을 통해 장흥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지만,
그 기록이 너무도 소략하여,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작가는 동학적 상상력을 통해 이소사에게 풍부한 서사를 부여하였다.
이를 위해 저자는 1970
년 영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이필제의 최초의 교조신원운동에서부터 그 역사를 써 나왔다.
그것을 통해 역사 기록으로 남겨진 이소사의 신이한 행적에 그럴 듯한 개연성과 판타지성을 동시에 제공한다.
이런 방식으로 “
소설 동학”
은 동학의 드러난 역사 이면에 비장된 비결과 비기,
그리고 현기들에 대한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6
권"
이나 되는 대하소설임에도,
동학에 대하여,
그리고 역사에 대하여 ‘
다 말해 버리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동학 속으로,
동학이 펼쳐지는 역사 속으로,
그 역사를 만들어가는 인물들의 이야기 속으로,
그리고 그 역사가 흐르는 우리의 국토 속으로 계속해서 파고들기를 요청하고 유인한다.
“
소설 동학”
의 또 하나의 미덕은 잊히고 묻힌 우리말을 풍부히 살려서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
임꺽정> <
장길산>
등을 지나 <
토지>
나 <
혼불>
등에서도 추구되었던 바이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독해력을 저감시킨다는 위험을 더 크게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언어들을 되살려 씀으로써,
우리는 말과 더불어 사라져 버린 민중의 세계관과 삶을 더 폭넓게 교접하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하나의 단어는 하나의 우주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을 읽으며 더욱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력한 이 소설의 무기는 '
동학적 상상력'
을 극한도로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운의 동학 창도 과정에서의 천사문답과 같은 '
종교적 신비체험'
을 그 신비성과 합리성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고 '
역사소설'
적 감각 속에서 그려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동학의 교리나 교사(
敎史)
적 관점의 우수성(?)
을 종교적 도그마에 굴복하지 않는 형태로 흥미진진하게 그려냄으로써,
살아 있는 동학,
열린 동학,
우리 안의 동학을 살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열린 결말을 채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동학은 해월의 수제자인 손병희로 승계되면서 1905
년 이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과 같은 역사의 전면에 다시금 나서게 된다.
이 소설은 거기까지를 다루고 있지 않으나,
그곳으로의 지평을 바라보고 있다. '
바라볼 뿐'
어설픈 허구적 낙관이나,
드러난 역사에 매몰된 허접한 비관 어느 쪽에도 이 소설은 가담하지 않는다.
소설 내내 그래 왔듯이,
드러난 역사와 드러나지 않은 흐름 모두를 껴안고,
역사의 지평 너머로 달려갈 뿐이다.
그 지평 너머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시 돌이켜 동학의 실재를 다시 개벽함으로써,
오늘 우리 존재의 실상을 다시 개벽하는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역사의 질곡에 대한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다시 새 날을 열어갈 힘이 된다.
■ 본문 중에서
○ “하늘이 명령한다는 것은 하늘이 사람에게 무엇을 시킨다는 말이다. 하늘은 음양과 오행으로 만물을 만들어 키우는데 기로 형상을 이루고 여기에 리를 부여한다. 사람은 생겨날 때 하늘이 부여한 기로 몸을 받고 하늘이 부여한 리로 인의예지신의 덕을 갖춘다.
만물 중 가장 신령한 사람은 이러한 오상의 덕을 행하는 것을 본성으로 삼는다.
본성에 따라 사는 것을 도라 한다. 도는 길과 같아 사람이 각각 타고난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좇으면 하늘의 궁극적 이치에 도달하게 된다.
도를 닦는다는 말은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사로움을 스스로 절제하며 사는 것을 이른다. 이러한 것을 배우고 묻는 것이 학문이다.” (본문 66쪽)
○ 제선은 장사를 접고 용담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틀에 대해 깊이 사색했다.
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이전에 김 진사댁 마당에 뒹굴면서
몸의 가장 말단에 있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선명하게 경험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내 몸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면 몸이란 것은 과연 무엇인가?
몸은 물질의 작은 조각들이 쌓여 이루어졌다.
몸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물질을 먹어야 하고,
못쓰게 되고 원치 않는 물질은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몸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이란 과연 무엇인가?
작은 물질 조각들은 생명이 없는데 이 몸에는 어떻게 생명이 깃들게 되었을까?
어느 정도의 복잡한 조직이 되면 생명이 들어오는 것일까?
생명이 들어오는 문지방은 과연 어디인가?
이것은 기적 같은 사건이다.(본문 144쪽)
○ “무위자연으로 가려면 어떤 공부가 필요합니까?”
“사물이나 사태를 판단할 때 감각이나 본능에 의존하면 욕심이 일어납니다. 욕심은 다툼을 일으키고 다툼은 분쟁을 일으킵니다.
모든 사물과 사태에는 대립 면이 있어 이것들이 서로를 향하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어느 쪽이 올바르고 어느 쪽이 그른지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어느 한쪽에 가치를 둡니다.
사물이나 사태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보기 위해서는 대립 면을 넘어서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도가 필요합니다. 도는 만물의 기준이 되므로 감각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고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도를 깨닫기 위해서는 언어와 개념을 떠나 도와 합치될 수 있는 수련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허심입니다. 허심이 무위자연으로 가는 공부입니다.” (본문 227쪽)
○ 이제까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오직 물질만 실체로 보는 시각에는 도가 계통이 있었다.
오직 마음만을 실체로 보는 시각에는 불도를 들 수 있겠다.
물질과 마음 두 가지를 실체로 보는 시각은 유학의 입장이었다.
나라는 존재의 궁극에 대한 것도 이 세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나라는 존재가 몸과 마음과 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흥해 김 진사 댁으로 무명을 나르던 날 새벽에 선명하게 경험했다.
내가 존재하려면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과 얼이 필요하지만, 내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본문 333쪽)
■ 저자 소개__ 김동련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문학석사. 경상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수료. 하곡인문도서관 관장.경상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방송통신대학교 출강. 도서출판 후아유북스 대표.후아유 문예창작아카데미 대표. 저서: 장편소설 『우리가 사랑할 때』(밥북), 『천자문으로, 세상보기』(인간사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