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 서평
1. 이 책은 많은 물음, 그러나 근본적이고 거대한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되는 물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하나의 질문이란 ‘어떻게 문명(文明)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제1권은 그 질문에 도달하는 전제조건으로서, 인간의 문명이 형성되는 근본적인 토대에 대한 여러 개의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간다. 그 질문들이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이기도 하다.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의미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질서란 무엇인가, 지식과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세계는 어떻게 가능한가?” 같은 것이다. 이러한 물음으로부터 범죄, 불법, 책임, 행위, 사건, 면책, 정당성 등의 개념이 의미를 갖고, 그러므로 위의 질문은 이러한 개념과 더불어 논의된다.
2. 이 책은 필연적으로,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근대 이후 500년에 걸친 ‘인간관’을 변혁한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기본의 상식을 전복하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이미 40년 동안 여러 방면의 과학적 실험과 철학적 논변으로 검증되고 있는바, 인간의 의식적인 자유의지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즉, 인간이 자유의지(라고 알고 있는)로써 행위를 의도하고 의식하기에 앞서서, 이미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것, 따라서 ‘자유의지’를 전제로 하여 물을 수 있었던 ‘(범죄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범죄론에 대해 근본적인 재접근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3. 이에 대해 저자가 제시하는 책임 개념은 “인지적(認知的) 자유의 부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문명적(文明的) 자유의 결여(缺如)에 따른 면책성”을 주장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인지적 자유란 ‘언어와 의미’가 우리 뇌의 신경과정에 개입하는 것을 근거로 하는 자유개념이다. 인간의 행위는 동물의 행동과는 달리 모두 행위의미(行爲意味)를 가지는데, 이것을 의미론적 개념이라고 하고, 이 의미론적 개념에 의해서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열려진 가능성을 인지적 자유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언어와 의미가 우리의 행위의 콘텐츠(내용)를 구성하고, 우리의 행위 사회적 의미(행위의미)를 스스로 선택한다는 자유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언어와 의미의 측면, 의미론적 개입이 열어 주는 인간의 유적(類的) 본질로서 자유가 있다.
4. 이 책의 저자는 ‘범죄’와 그 전제로서 ‘책임’의 개념에 대한 분석과 ‘개념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통해 결국 이것이 인간의 정체성 그리고 그 인간이 구성하는 최고-최대의 집단적 산출로서 ‘문명’의 문제와 이어진다고 말한다. 우선 저자는 “인간이 있어서 개념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이 있음으로써 인간이 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범죄라는 것을 개념으로 정의하고 이를 처벌하는 질서로서 성립하는 점점의 질서체계가 곧 국가이며, 그 국가들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체계가 바로 문명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범죄와 국가와 문명은 삼위일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셋 중 하나의 개념이나 범주가 변하면 그 나머지도 따라서 변화하게 된다. 지금 인간과 인간의 문명은 바로 이 ‘범죄-국가-문명’의 거대한 전환기에 놓여 있다.
5. 이 책의 2권은 ‘개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분석철학의 응답을 고찰하고, 분석철학 이후의 철학을 모색한다. 이 ‘이후의 철학’은 ‘문명적 차원’을 다루며 분석철학을 비롯한 제 학문의 성과를 반영하여 ‘해석학적 방법론’을 취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인식론, 의미론, 존재론, 가치론을 재구성한다. 이 책의 3권은 1권과 2권의 논의를 기반으로 ‘범죄론의 신형상’을 추구한다. 지난 200년 동안 ‘범죄론’을 둘러싼 논점의 핵심은 ‘범죄는 행위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결론적으로 ‘범죄는 행위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관점을 취하여 “범죄란 불법과 책임이 귀속되는 사건이다”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범죄 개념의 재정의는 책임과 면책성에 대한 개념의 재정의를 요구하고 그에 응답하는 과정은 문명적 자유의 논리에 따라 특정 사회의 문명을 재구성하는 데로 나아간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6. 저자는 이상의 논의를 전개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조어(造語)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이를 권두에 밝혀 놓았다[45-51쪽]. 즉 기존의 용어를 한정적인 또는 확장적인 의미로 쓰거나, 새로운 합성어로써 새로운 의미를 표시한다. “공동환상(共同幻想), 사적환상(私的幻想)”, “관문(觀問), 관문의식(觀問意識)”, “기제(機制)”, “기표(記標), 기의(記意)”, “내관세계(內觀世界), 미시세계(微視世界), 가가시세계(可視世界), 거시세계(巨視世界)”, “대개념(大槪念), 대비개념(對比槪念)”, “데카르트 프레임”, “독일체계(獨逸體系), 영미체계(英美體系)”, “문명(文明)의 논리공간(論理空間)”, “범죄론(犯罪論), 범죄론 체계”, “사건(事件)”, “사회인문학(社會人文學)”, “시야(視野)”, “에토스(etos)”, “유개념(類槪念), 종개념(種槪念)”, “유태성숙(幼態成熟)”, “의미론적 개입”, “의미론적 기술(記述)”, “작동적 폐쇄성”, “주연자(主演者)”, “콘텐츠”, “테제”, “통속적(通俗的” 등이다.
■ 본문 중에서
오랫동안 책임은 인간이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법(適法)를 선택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법을 선택한 데 대한 비난(非難)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 인간의 의식적 자유의 관념이 환상(illusion)이라는 신경과학(neuroscience)의 실험이 제시되었다. (중략) 이 실험 이후로 40여 년 동안 많은 추가적 실험들이 행해졌고, 신경과학자, 철학자, 사회심리학자 등 많은 학자들이 자유의지 논쟁에 참여하였다. 이 책은 이 모든 논의를 재검토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책임 개념을 제시한다. 필자가 제시하는 책임개념은 인지적(認知的) 자유의 부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면책성은 문명적(文明的) 자유의 결여(缺如)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1권의 논의 내용이다. (6쪽, 서문)
우리는 근대 이후 500년이 된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란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의지에 의해 행동하며, 그러한 개개인들이 합의하여 사회를 구성하고, 이성(理性)의 빛에 의하여 자연의 진리를 밝혀내어 문명(文明)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신경과학은 자유의지만이 아니라, 우리가 개념(槪念)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에 대응하는 그러한 정신, 마음, 이성(理性), 자아(自我)와 같은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신경세계에는 이들에 대응하는 신경상관자(神經相関者, neural correlates)가 없는데 어떻게 이들을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7쪽, 서문)
우리 문명사회는 (원시 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살인을 찬양하는 대신 살인을 죄(罪)로 만들었다. 그 외 여러 가지 행위들을 죄로 규정함으로써 그것을 금지하는 것이 사회질서(社会秩序)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질서(秩序)가 탄생한 것이다. 동시에 이것이 바로 사회와 문명의 탄생이기도 하다. 즉, 범죄를 처벌하는 질서가 성립되는 것이 문명의 탄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국가와 권력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죄와 국가와 문명은 동시에 탄생하였다기보다 그것은 하나이다. 죄의 개념은 동시에 불법(不法)의 개념과 정당성(正当性)의 개념을 형성한다. (21쪽, 개요)
우리는 과연 약 4,000년 전의 사람들보다 사회에 관하여 더 나은 개념들을 가지고 있을까? (중략) 지금까지 인류가 발전시킨 범죄의 정의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독일체계(獨逸体系)가 제시한 것으로, ‘범죄란 구성요건에 해당하고 위법하고 책임 있는 행위이다’라는 정의이다. (중략) 사회질서의 가장 기초가 되는 범죄의 개념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하여 위 범죄정의에 기초하는 독일체계는 미국의 hearsay rule(伝聞法則)과 함께 인류가 창조한 사회인문학(社会人文学)에서 최고의 발명(發明)으로 평가된다. 이 책을 읽는 사람
이 만일 범죄개념의 정의에 대하여 뭔가 다른 개념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는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다. 저자는 독일체계와 영미체계를 종합한 새로운 범죄론 체계를 제시할 것이다. 물론 새로운 범죄개념의 정의도 제시할 것이다. (22쪽, 개요)
인지적 자유의 부담으로서 책임은 가혹한 것이다(타행위가능성이 없다). 여기에 우리 문명은 면책성(免責性)의 개념을 문명의 콘텐츠로 발전시켜 왔다. 책임과 형벌은 우리 문명의 한계(限界)이다. 이러한 한계 내에서 인류는 멀리 3,800년 전부터 또는 2,000여 년 전부터 이러한 책임에 예외(例外)를 인정하는 제도를 발전시켜 왔다. 그것이 면책성(免責性)이다. 사실 실제적으로는 책임보다 면책성의 개념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면책성의 근거를 문명적(文明的) 자유의 결여(缺如)로 규정한다. 문명적 자유란 우리의 문명이 보장해 주는 자유이다. 그것은 가시세계에서의 의식(意識)을 전제로 하여 규정하는 의식적 자유(自由)에 기초한다. 문명적 자유는 문명의 수준(水準)에 따라서 다를 수 있겠지만 합리적(合理的) 자유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개인에게 문명이 제공해 주어야 할 자유이며, 문명의 수준을 반영하는 자유이다. (38쪽, 개요)
자유의지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간명하게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결정성(決定性)에 의해 규정되나, 의미론적으로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자유의지가 없으나 의미론적으로 인지적 자유가 있다. 브루투스(Brutus)가 시저(Caesar)를 살해한 행동은 결정론적으로 발생한 것이지만, 공화국의 적을 살해한다는 그 행위의미(行為意味)는 브루투스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神祕)이다. 존재론적으로 결정적인 것이 어떻게 의미론적으로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결정성과 자유가 동전의 양면을 형성하는 것, 이것이 인간존재에 귀결된 진화의 신비이다. (7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