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은 그의 『동경대전주석』에서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는 체험과 수운의 대각 장면을 비교해서 말했지만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 도올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비교는 수운만의 체험을 약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운의 문장은 간결하고 담백하다. 그 어떤 과장이나 꾸밈도 없다. 참으로 솔직 담백한 분이다.
수운의 신은 생성의 사건에서 등장한다. 졸래졸래 만물의 배후에 숨어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거나 명령하는 신이 아니다. ‘그것이 그럴까 어찌 그것이 그럴까’ 하는 물음에 감응하여 나타나는 신이다. (豈其然之疑기기연지의 - 「포덕문」 5절) 만물이 자기 생명활동하면서 생성할 때에 감응하는 신이다. 「논학문」의 ‘無事不涉 無事不命무사불섭 무사불명’은 신의 간섭이나 명령이 아니라 만물의 생성에 함께 한다는 뜻일 터이다. 내유신령이란 수심정기하는 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에 원초적으로 있다. 이것이 동학 신의 위대함이다. 「포덕문」의 6절 문장은 이점을 여실히 증명한다.
‘불의사월不意四月’ ‘뜻밖에 사월’이라고 읽으면 그만이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다. ‘불의’란 양자역학 식으로 말하면 양자도약이다. 바로 앞의 ‘豈其然之疑기기연지의’ ‘그것이 그럴까 어찌 그것이 그럴까’ 하는 물음이 도약한다. 이 우주에서 저 우주로 도약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에서 사물은 다중 상태에 있는데 현실의 사건에서는 한 측면만 드러난다고 한다. 하여 실재(Reality)는 그 전모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우주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있다고 한다. 그 놈의 실재가 오리무중인 것이다. 때문에 어떤 사건에서 다중의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불의’란 수운이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 다른 사건의 지평선에 도달한 표현이다. 우주의 팽창가속 때문에 대략 160억 광년의 어느 지점에서는 빛이 도달하여 정보를 전달할 수 없는데 이 지점을 사건의 지평선이라 한다. 그 너머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있다. 그 지점을 넘어서면 대각이고 득도며 한소식을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불의사월이란 사건의 지평선을 넘은 것이다. 그러니 필자 같은 평부가 어찌 수운의 그 순간을 읽어내겠는가?
수운의 이 문장에서 ‘상제’, ‘영부’, ‘선약’이 무엇의 은유냐고 묻는 것은 부질없다. 이것들은 범부의 세계에서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 또 다른 세상에 있는 것들이다. 대각, 득도, 한소식을 하지 않아도 또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자들은 이미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상제, 영부, 선약을 만나고 있다. ‘상제’, ‘영부’, ‘선약’은 이미 내 안에 있는 ‘內有神靈내유신령’체 이다. ‘守心正氣수심정기’하지 않아도 이미 내 안에 ‘侍天시천’한 것이다. '수심정기' 즉 하늘의 마음을 지키고, 하늘의 기운을 바르게 함으로서 또 다른 세상이 시작한다. 양자역학의 다중우주에서 이 우주에서 저 우주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것을 수운은 ‘우형又形’이라고 표현했다. ‘吾有靈符 其名 仙藥 其形 太極 又形 弓弓오유영부 기명 선약 기형 태극 우형 궁궁’ 영어로 말하면 ‘Another world’라고 할 수도 있겠다. 수운의 말로 하면 다시개벽의 세상이다.
물리학에서는 아직까지는 사건의 지평선에 도달할 수 없다. 사실상 그것은 무궁한 거리다. 그럼으로 인간의 상상력은 무궁하다. 그 어떤 세상이라도 꿈꿀 수 있다. 꿈꾸는 자에게 영부, 선약은 효험이 있고, 꿈꾸지 않는 자는 현재 세상의 영부와 선약으로 현재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사건의 생성은 무한대다. 인과율의 제한을 받더라도 인간이 밝힌 인과율은 몇가지 되지 않는다. 밝혀지지 않은 인과율이 더 많다. 물리학, 생물학 등이 밝힌 인과율은 우주정보의 0.0000.....01이나 될까?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사실상 무궁하다. ‘無窮我무궁아’이고 ‘無極大道무극대도’이다. 필자는 이것이 아래 문장의 내용이라고 여긴다.
“受我此符 濟人疾病 受我呪文 敎人爲我則 汝亦長生 布德天下矣수아차부 제인질병 수아주문 교인위아즉 여역장생 포덕천하의”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수운은 「포덕문」 6절 전체에서 사실상 상제와 맞짱을 뜨고 있다. 세상이 왜 이 따위냐고 따진다. 물론 그런 글귀는 없다. 하지만 행간에 있다. ‘問其所然문기소연’이 그것이다. 직역하면 “왜 내게 상제가 나타나셨는가?”지만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당신이 상제라면 세상이 왜 이 따위냐?” 그랬더니 상제가 말한다. ‘曰余亦無功故왈여역무공고’ “내가 공이 없다.” 『용담유사』 「용담가」에서 수운은 이 장면을 “나도 또한 개벽 이후 노이무공(勞而無功)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得意) 너희 집안 운수로다.”라고 썼다. 수운은 공이 없는 상제를 ‘ᄒᆞᄂᆞᆯ님’으로 바꿔버린다. 수운의 동경대전에서 상제는 여기서 1회 나오고 『용담유사』에서는 3회밖에 없다. 『용담유사』 「도덕가」에서 “천상에 상제님이 옥경대(玉京臺)에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음양이치 고사하고 허무지설(虛無之說) 아닐런가.”라고 하면서 수운은 '상제'를 폐기해버린다. 수운의 ‘ᄒᆞᄂᆞᆯ님’은 존재와 사건의 밖에 있는 절대자가 아니고 존재의 안(내유신령)에 우주적 사건의 과정에 있는 생성자, 생성의 신이다. 수운은 이것을 주문에서 ‘造化定조화정’이라고 했다.
여기서 구구절절 당대의 민중이 알던 '상제', 원시유교의 '상제'가 어떤 존재인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수운이 상제를 ‘ᄒᆞᄂᆞᆯ님’, ‘天主’로 바꿨다는 뜻이다. 바로 이 장면이다. ‘曰然則 西道以敎人乎 曰不然왈연즉 서도이교인호 왈불연’“그러면 서도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曰不然’ 왈불연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비로소 동학이 탄생한다.
‘曰余亦無功故왈여역무공고’, ‘勞而無功노이무공’의 주체는 누구일까? 수운의 문답에서는 상제로 보이지만 상제가 아니다. 수운에게 ‘상제’, ‘ᄒᆞᄂᆞᆯ님’이든, ‘天主’든 만인만물에 내재해 있으므로 공이 없다는 주체는 곧 만인만물이다. 이 무슨 말인가? 공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만인만물이 지구에서 무위이화의 생성을 하는(일, 사건) 공이 엄청난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도리어 억압과 불평등에 처해 있다는 역설이다. 그래서 ‘又形우형’이 필요하다. ‘우又’는 전환의 언어이지 나열의 언어가 아니다. 필자는 이런 견해를 포덕문 4절 ‘又此挽近以來우차만근이래’에서도 종래의 해석인 ‘또 근래에 이르서’의 순접속사가 아닌 ‘달리 생각하면 근래에 와서’라고 해석한 적이 있다. 동학은 ‘又形우형’ 즉 '다시개벽"이다.
포덕문 6절은 동학창도의 순간을 아주 드라마틱하게 그러나 아주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 ‘又形우형’에 주목하여 깊은 생각을 하게 한 이는 정읍에 있는 생명사상연구소 소장 사발지몽(주요섭) 님이다. 고마움의 인사를 드린다. 사발지몽 님 ‘처음뵙겠습니다.’ 1초 전의 그는 사라지고 무이이화로 다시개벽하여 새롭게 나타난 ‘우형’이니 인사는 늘 ‘처음뵙겠습니다.’이다. 이 또한 사발지몽의 가르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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