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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우울한섬 2018. 6. 1. 15:45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서학의 유입과 조선 후기의 지적 변동

■ 이 책은…

서학이 중국에 들어와 동서양의 지적 융합이 일어나는 과정과 조선의 지식인들이 서학의 지적 도전에 응전하는 태도와 실천의 전개 양상을 논구하여, 서학은 피동적 외압적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들이 선별적 능동적으로 수용되었으며, 조선인들이 자기 전통을 비추는 거울로 삼아 고유 사상과 세계관을 심화 확장시켜 근대의 조선학을 향해 나아갔음을 밝히고 있다.



  • 지은이 : 김선희
  • 발행일 :    2018년 5월 31일
  • 가  격 :    15,000원
  • 페이지 :   312쪽(두께 15mm)
  • 제  책 :    무선
  • 판  형 :    152mm ✕ 225mm (신국판)
  • ISBN : 979-11-88765-17-1 (93910)

■ 출판사 서평

선의 지식인들은 서학으로 성리학을 확장하여
조선의 미래를 열어갈 비전을 발견하려 하였다

1. 서학이 곧 천주교인 것은 아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서학’은 어떤 의미일까? 서학은 대개 서교(西敎) 즉 천주교와 동의어로 이해된다. ‘천주학’이라는 이름도 그래서 자연스럽게 혼용된다. 그 결과, 서학 전래 이후의 역사 전개 과정의 결과론에서 비롯된 오해가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것은 서학이 수난과 순교를 겪으면서도, 결국은 조선 사회에 ‘자신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는 방식으로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서 전교되기 전에, 먼저 조선인 자신들이 직접 중국에서 이를 수용하였다는 점도, ‘자랑스러운 서학 수용사’의 특징으로 거론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서학은 ‘천주교’의 하위개념으로서, 천주교 수용의 전사(前史) 또는 배경으로서 자리매김 되기 십상이다.

2. 서학은 동양화된 서양 문화이다

그러나 실제로 서학을 수용하는 데 열심이었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서학은 ‘천주교’라는 종교체제만이 아니라, 서양의 천문학, 의학, 철학 등 서양의 학문체계 전체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선 혹은 동양(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서학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학술 언어와 체계를 통해 외부세계로 나아가는 통로로 삼았다는 점이다. 즉 초기 서학은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서학의 전래자들이 서양의 종교, 수학, 천문학, 과학 서적들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1차적인 지적 변용을 겪어야 했다. 나아가 서학이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올 때는 다시 한 번 변용을 일으키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성리학’을 보완하는 체계로서 서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연구하며 때로는 거부하고 때로는 수용하였다.

3. 종교로서의 서학도, 유학의 틀 안에 놓여 있었다

서학은 ‘종교로서의 서학’과 ‘과학으로서의 서학’으로 이분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과 동양)의 지식인들에게는 ‘종교’라는 범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서양의 선교사들이 의도했던 ‘전교(傳敎)’가 온전히 관철될 수 없었다. 서학을 학문으로서 연구하고 활용하거나 거부한 일군의 실학자들과, 상당한 정도로 깊이 연구하고 한때 개종도 고려하였던 것으로 알려진 정약용 등은 물론이고 그로부터 한 걸음 더 깊이 나아가 ‘개종’을 단행하고 이를 신앙한 이벽과 같은 유학자 출신의 ‘천주교인’들까지도, 서학은 유학(성리학)이 지향하는 깊은 학문으로서 자기를 닦고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수기치인의 범주로서 수용되었다는 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서학의 수용과 서학으로의 개종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선별적으로, 그리고 자기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진행되었다.

4. 종교로서의 서학은 동학의 유사점이 더 많다

반면에 서학이 ‘종교’로서 조선인에게 수용되는 과정은 서학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상식’ 수준에서 이야기되는 ‘동학’이 조선의 민중들에게 수용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만민 평등의 사상에 따라 지금까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신분의 해방 내지 상승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그 공동체 내부에서 경제적 상호 부조의 혜택을 기대할 수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천주교인들의 순교’는 다분히 당시의 당파싸움의 여파로서 발생한,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유래한 재앙’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순교의 역사가 서학 수용의 원형(原形)과 원질(原質)을 압도하면서, 그 이후의 서학=천주교 역사는 초기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5. 조선의 지식인들은 왜 서학을 수용하였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렇다면 왜 초창기의 서학 수용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외래의 가르침을 자기 삶에 받아들이고, 사회에 소통시키고자 하였는가?” 그것은 그 ‘성리학자들’이 이미 오랫동안 자신들이 발전시켜 오던 형이상황과 인간론, 천문학과 수학, 지리학의 체계 위에서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태도로 서양의 지식을 수용하여 당시 교착 상태에 빠진 성리학적 한계를 돌파함으로써 성리학의 심화와 확장, 그리고 그것을 통한 시대적 과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6. 서학, 성리학의 한계를 넘어선 성리학으로 조선학(朝鮮學)을 지향하다

특히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학 특히 지도나 천문학, 서양 역법 등을 통해 동아시아의 중화질서의 한계(청이라는 오랑캐 국가와 중화 사이의 모순)를 넘어서는 계기를 발견하였고, 나아가 그런 관점에서 서학을 매개로 하여 진정한 문명 소중화(朝鮮) 문명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서학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진면목 혹은 자신들이 지향해 나가야 할 진정한 조선학(朝鮮學)으로 나가는 하나의 통로로서 다가왔으며, 조선의 지식인들은 성리학의 한계에 갇힌 성리학=실학이 아닌, 성리학의 한계를 넘어선 성리학=서학을 지향해 나갔던 것이다.


■ 책 속으로


제1장 – 조선 후기를 서학으로 읽는다는 것
조선 후기를 서학으로 읽는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밀고 들어와 내부를 통제하는 타율적인 힘이 아니라 유사한 언어와 개념을 통해 설득과 승인을 요구했던 유연하고 입체적인 중첩의 과정을 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서학에 접근한 조선 유학자들은 서학을 자기 사상의 보강재이거나 지적 자원으로만 활용했으며 필요한 내용만을 선별적으로 취사선택해 수용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서학은 이들에게 목표가 아니라 도구이자 경로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서학 이해를 일방적인 ‘영향’ 관계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전제이다. <23쪽>


제2장 – 예수회의 중국 진출과 서학의 형성
사실 이러한 천주=상제의 구도는 예수회 내부에서 더욱 문제가 되었다. 본래 『천주실의』에 사용된 상제라는 명칭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인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놓은 교두보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회 회원들 중 누구도 그들의 신이 ‘상제’라는 명칭으로 고착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마테오 리치의 번역어는 전례 논쟁의 빌미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교황령에 따라 천주 등 다른 개념으로 대체됨으로써, 기독교적 문맥에서 사라졌다. 전례 논쟁 끝에 상제 등 예수회가 채택한 용어들은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의 의례 금지령(Ex illa die)을 통해 대부분 금지되었고, 중국과 조선 내 기독교 신자들의 조상 제사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50쪽>


제3장 – 서학의 조선 유입과 조선 지식장의 변용
조선인들은 지구설을 비롯해 다양한 천문학적 지식들을 서학서뿐 아니라 이를 연구한 중국인들의 학설을 통해서도 받아들였다. 축적된 서학의 정보를 활용하여 연구를 진행한 중국인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서학서 외에도 서학을 자신들의 지적 문맥 안에 끌어들여 논한 중국 지식인들의 서적을 통해서도 서학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필연적으로 절충과 종합, 오해와 재문맥화라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당시 중국과 조선인들에게 중국어로 된 서학서나 서학을 활용한 연구들은 순수한 서양 지식으로 수용될 수 없었던 것이다. <94쪽>


제4장 – 서학을 향한 성호의 지적 도전
성호는 다른 유학자들과는 달리 이단에 오염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잘라내고 자신의 실용적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선택과 운용의 능력을 자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입장에서 서학은 백성들의 살림을 책임지며 동시에 도덕적 자기 수양을 그치지 않는 유학자의 본령에 합치하는 유용한 지적 자원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수양과 백성에 대한 책임[修己治人]이라는 유학의 핵심적 이념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자원도 선택해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23쪽>


제5장 – 서학과 성호학파의 분기
서학을 둘러싼 성호학파의 갈등과 분기는 사실상 외래의 학술을 향한 성호학파의 개방성과 퇴계를 따르는 남인의 계보 안에서 지적 권력을 확보하려는 기호남인들의 보수적 지향을 모두 보여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느 쪽도 유학의 핵심을 넘어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지적 자원에 개방적으로 접근하면서도 전통적인 정학의 계보를 지향했던 이들은 일면 이중적이고도 복합적인 사상적 궤적을 그리는 듯 보이지만 그 궤적의 중심은 하나다. 진정한 학문으로서의 유학이다. 성호학파 가운데 신앙에 가깝게 나아간 이들이나 극단적으로 서학을 배척한 이 모두 자신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유학을 삶 속에서 실현하려는 의지의 소유자들이었다. 서학을 수용한 이들은 천주의 존재를 통해 도덕성을 극대화시키고자 했고, 서학을 배척한 이들 역시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천주교를 부정해야 진정한 유학의 정신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유학의 확장이라는 동일한 학문적 지향을 지녔음에도 각론과 자원의 차원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했던 것이다. <146쪽>


제6장 – 서학의 내파: 이벽과 정약용의 서학 연구
정약용의 서학 수용은 여러 분과를 폭넓게 활용하는 박학 차원의 접근이 아니라 성리학의 이기론과 심성론 등 철학적 이론을 논파하는 과정에 활용된다. 이벽 역시 서학 더 나아가 천주학을 바탕으로 『중용』의 세계를 일종의 신학적 세계상으로 읽고자 한다. 이 두 사람이 보여준 이론적 지향은 이 시기 서학이 어떤 지향을 가진 학자들을 움직였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움직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두 사람은 서학의 이론이 성리학이라는 정통의 담론을 바꿀 정도로 내파의 역량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이 내파를 단순히 서학에 의한 성리학의 부정이나 전면적 교체라고 보기 어렵다. 이벽과 정약용이 서학을 성리학의 이론을 재해석하는 데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양자가 궁극적으로 우주의 본질과 인간의 존재에 대해 깊은 관심이 두는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서학도 유학-성리학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이론적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179쪽>


제7장 – 서학과 새로운 격물의 지향
조선 유학자들이 서양, 즉 중국 외부에서 형성된 이단의 지식 체계를 새로운 지적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로 조선 후기의 지적 풍토를 들 수 있다. 조선 후기는 성리학의 핵심 이론인 이기론, 심성론 등의 사변적 논의들과 별도로 다양한 분야의 실용적 지식, 즉 박학(博學)을 추구하던 지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185쪽>


제8장 – 척사의 시대: 서학에서 천주학으로
조선 후기에 서학은 강고한 주류 담론들의 저변에서 점진적으로 사상적 갈등과 분화의 핵으로 부상한다. 물론 서학-천주학의 영향력이 실제로 조선 민중들 전체를 동요시키고 성리학의 사상적 정통성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서학에 경도된 이들은 중앙의 고위 관료나 중심적 학파가 아니라 기호남인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서학·천주학에 대한 집권층의 폭압적인 탄압은 실질적 위협이 아니라 이념의 위험성과 그에 따른 잠재적 폭발력에 대한 상층부의 위기의식과 불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다른 각도에서 서학을 둘러싼 남인들의 갈등은 국가적 위기나 상층부의 분열이 아니라 학파의 정통성을 지키고 지식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지적 투쟁의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서학은 조선의 정치, 사상, 학파 등 다양한 국면의 불균형과 모순들을 드러나게 하는 일종의 거울이었다. <244쪽>


제9장 – 박학의 시대: 서양의 체험과 지식의 변화
어쩌면 그는 유학이 마지막으로 작동하던 시대에서 유학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모색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분명한 것은 최한기가 자기 언어로 자기를 상상하고 구상하며, 타자의 이론을 자기 언어로 바꾸어 자기 체계 안에 도입할 수 있었던 마지막 사상가였다는 점이다. 학술의 언어를 잃으면 세계관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후로 동양과 서양은 각기 다른 이유에서 개별 분과를 포섭하는 거대하고 체계적인 상위 체계, 전체를 포섭하는 보편학에 대한 확신과 기획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270쪽>


제10장 – 다시 조선, 유학 그리고 서학
조선 지식인들에게 서학과의 만남은 외부의 관점을 통해 자기 언어를 재검검하고 이론적 세부를 다시 조정하는 과정을 통한, 진정한 문명을 향한 유학자의 자기반성이자 확장의 과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두 세계관의 조우를 일방적인 전달이나 거부가 발생했던 닫힌 영역이 아니라 상호 간의 논쟁이 발생했던 사상적 개방 공간으로 보고 이들의 대응과 변용을 철학적 논리로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277쪽>

■ 차례

1장 서학과 중국 그리고 조선

1. 서학과 동아시아
2. 조선 후기를 서학으로 읽는다는 것

2장 예수회의 중국 진출과 서학의 형성

1. 마테오 리치와 그 주변
2. 예수회의 지적 도전
3장 서학의 조선 유입과 조선 지식장의 변용
1. 서학서의 조선 전래
2. 서양 학문과 문물의 조선 전래
3. 시헌력의 도입과 서학중원설

4장 서학을 향한 성호의 지적 도전

1. 성호 이익의 삶과 학문
2. 성인(聖人)의 학문으로서의 서학  
3. 삼심설과 뇌낭설
4. 십이중천설에서 천리경까지
5장 서학과 성호학파의 분기
1. 성호학의 계승자들과 서학
2. 신후담의 서학 비판 
3. 안정복의 서학 비판

6장 서학의 내파: 이벽과 정약용의 서학 연구

1. 서학을 만난 다산 정약용
2. 이벽의 유교적 신앙  
3. 서학과 정약용의 철학적 도전
7장 서학과 새로운 격물의 지향
1. 18세기 조선의 지적 변화
2. 우주론을 통한 세계관의 변화
3. 북학론자들과  서학
4. 연행록의 서양 문물 체험

8장 척사의 시대: 서학에서 천주학으로

1. 조선에서 도통과 이단
2. 정조와 채제공의 서학 인식  
3. 신유교난과 황사영 백서 사건
4. 성호 후학의 반서학적 저술  
5. 영남 남인의 서학 비판

■ 저자 소개

김선희_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 박사(「중세 기독교적 세계관의 유교적 변용에 관한 연구」).
『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심산, 2012),『실實, 세계를 만들다』(글항아리, 2017),『하빈 신후담의 돈와서학변』(역서, 사람의무늬, 2014),『8개의 철학지도』(지식너머, 2014),『조선 유학의 이단비판』(새물결, 2017, 공저) 등의 저역서와「다산 정약용의 유가적 공적 세계의 기획 :『경세유표』를 중심으로」(2017), 「양을 훔친 아버지를 숨겨 주어야 하는가?: 논어에서 정의와 책임」(2016),「예와 자연법: 크리스티안 볼프의 유교 이해를 중심으로」(2016) 등의 논문이 있다.
예수회의 중국 진출로 촉발된 동서양의 지적 교류와 그 파장에 대해 연구하는 한편 인간관, 문명의식, 과학 등의 관점에서 근대 동아시아 유학의 전환과 확장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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